[요양보호사수기] 여애자님 - 미움도 꽃처럼 피고 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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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노인복지센터 작성일 11-06-21 08:26 조회 1,361회 댓글 0건본문
저는 7학년(?)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요양보호사’?? 하며 제 식구들인 아들, 며느리, 딸, 사위까지 뜯어 말리는 원성이 자~자~ 합니다. 누가 제 나이를 들으면, 사실 장기요양서비스를 받을 나이에 무슨 요양보호사 활동이라고 욕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는 주로 장기요양서비스 대상을 상대로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 등급을 받지 못한 어르신에게 노인복지센터에서 복지사업으로 파견되어 말벗이나 가사활동 등을 지원하는 가정봉사원 활동으로 참여 중입니다. 봉사활동을 시작한지 20년시간이 흘렀는데, 현재 나이나 체력적인 상황으로 봐서는 제 지원이 필요한 저에게는 딱 맞는 활동이라 보람있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저의 긴 봉사와 직업 활동 중에는 2008년 장기요양보험제도의 시행으로 장기요양대상자로 만났던 그 분과의 추억은 저에게 참으로 강렬합니다. 대상자였던 그분의 괴팍하고도 지능적인 성향으로 에피소드도 많고 마음고생으로 인한 미운정도 많이 쌓였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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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제가 소속된 노인복지센터에서 시각 장애인대상인 진○○ 어르신께 봉사활동 개념으로 들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장기요양등급 3등급을 받으시면서 제가 요양보호사 활동을 가게 되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시다 보니 본인이 눈으로 못 보는 상황으로 인해 늘 의심이 많으셨습니다. 어릴적 친구들과의 장난으로 두 눈을 다쳐 시각장애인이 되었는데, 14세에 계모와 형에 의해 먼 지역인 울진에 버려지며 세상과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쌓이게 된 개인 이력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앞을 못 본다고 버림을 당했으니 어느 누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심정적으로는 너무나 안타깝고, 연민의 정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분의 행동이나 말을 당해보면(?) 정이 딱 떨어졌습니다. 앞을 못본다 뿐이시지 사실 머리는 너무나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시면서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성경책의 내용을 줄줄 외셨다고 하면 믿으시겠지요. 그 좋은 머리로, 뛰어난 언변으로 요양보호사인 저의 속을 뒤집으시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였지만, 지금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습니다.
하루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집에 가려는데 어르신이 늘 가는 병원에 가서 갑자기 약을 좀 타다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료보호증(의료급여1종)을 받아들고는 나왔지요. 다음날이 공휴일이라 그런지 병원에는 대기자들이 많이 밀려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약을 타서 가는 길에 센터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어르신의 의료보호증 들고 가서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하며 갔다고 전화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거운 물약을 낑낑대며 교통비를 아끼려고 택시 대신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 저에게는 너무도 힘이 빠지는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급한 마음으로 어르신댁을 방문하였더니, 어르신은 더욱 화를 내시면서 “내 돈 안내는보호카드를(의료보호증)을 당신의 돈내는 보험증하고 바꿀라고 했지요?!”라며 말도 안되는 생떼를 쓰셨습니다. 본인의 의료보호증이 탐이나 내 것하고 바꿀 수도 있을거라고 망상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어르신과 싸울 수 없어, 속상한 마음으로 어르신의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앞집 사람이라도 불러 확인해 보시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날 상황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억울하게 덮어씌우는 어거지에 덧정이 없어 일을 그만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제 마음도, 어르신 마음도 진정이 되면서 그 어르신에게 있어서 의료보호증은 오히려 사람보다도 자신에게 힘을 주는 소중한 것이었겠거니 라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다시 정성스럽게 모셔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어르신과의 일상은 고만고만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소 어르신은 돈에 대한 집착 또한 상당히 강하셨는데 독특한 방식으로 돈을 관리하셨습니다. 저에게 옷핀을 사다달라 하셔서, 손의 감촉으로 오만원권, 만원권, 오천원권을 구분하시고는, 오만권에는 옷핀 3개를, 만원권에는 옷핀 2개를, 오천원권에는 옷핀 1개를 꽂아 놓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시니 매번 감촉으로 빨리 구분할 수 없으니, 스스로 빨리 알아채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 관리하시던 돈 중 오만원권으로 20장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제가 출근하자마자 없다고 난리가 나셨습니다. 아무도 온 이가 없었다고 하시는 말씀의 뉘앙스에는 저를 의심하는 것 같아 또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큰 돈이 없었졌다면 엄청 걱정을 하시거나 화를 내셔야 하는데, 몇 번 말씀하시면서 계속 의심스러운 말씀만 하실 뿐이지 생각보다는 덜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찝찝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싶어 며칠 동안 큰 부담감을 느끼다가 꾀를 내었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큰 돈을 잃어버리셨다니 어짭니까?.. 제가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오신게 맞는지.. 은행에 가서 여쭤보겠습니다” 했더니 어르신이 갑자기 제 손을 꼭 쥐면서 “그러지 말라”고 하시더니 그때 이후로는 돈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일은 없었지만 하마터면 고스란히 도둑으로 누명을 덮어쓸 생각에 망연자실하였습니다. 그런 소소한 의심과 억울함의 사연들이 늘 있었습니다.
장애인 가운데 제 개인적으로는 시각장애인이 가장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으니 믿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 이해는 되어지면서도 막상 대상자로 모시면서 서비스를 지원해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또 언제 어떤 오해를 살지 모를 불안감이 늘 컸습니다.
저는 시댁과 친정의 부모님이 치매를 앓고 돌아기기 전 까지 케어해 드렸기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힘듬을 잘 극복을 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0년이 넘게 봉사활동을 해 오면서 다른 친구들이 ‘좀 편하게 살지, 왜 그렇게 사냐?’며 핀잔을 줄 때마다, 더러운 것도 모르고 냄새나는 것도 모르며, 오히려 지저분하고 어려운 곳을 찾아다닐 때마다 제 가슴이 뛰며 제가 더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을 언급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말합니다. “천성이다, 천성!”
그런 어르신이 1년뒤 장기요양등급판정의 갱신을 받으시면서 등외로 등급이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앞이 안보이셔서 제가 거의 모든 가사활동(청소, 빨래, 음식준비, 병원동행 등..)을 지원해 드렸는데, 어르신의 인지능력이나 언변이 워낙 뛰어나시다보니 앞이 전혀보이지 않으시는데도 등급을 받을수 없는가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노인복지센터에 어려움을 이야기 하여 장기요양서비스가 아닌 노인복지서비스로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지속적으로 저는 활동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운정이 차곡이 쌓여져 가던 어느 날, 당신도 돌아가실 줄 알았는지, 돌아가시기 몇 달전부터 자식도 아니고 그렇게 불신하시던 제게도 ‘집에 가지 마라’, ‘자고 가면 안되냐’, ‘당신이 없으면 더 아프다’라고 호소하시었습니다. 일생에 끝에서 결국 저 하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어르신의 삶을 보자니 제 마음이 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보이는 눈을 깜빡거리시며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하시더니
“아줌마는 인물이 괜찮아요?”하셨습니다.
안 보이시니 3년을 방문하던 제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셨나 봅니다.
“아니요, 못난 편이예요~”
라고 한마디 대꾸하면서도 마음이 애잔하였습니다.
2010년 11월, 대상포진으로 영대병원에 입원하셔서 누구하나 찾아오지도 않는 병실에서 저만 쓸쓸히 임종을 지켜보다가, 어르신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어르신이 가족하나 없이 꼬장하게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어르신과 함께 한 3년의 영향 때문인지 어르신에게 가는 날이 되면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준비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고, 마음 한 구석이 텅빈 것 같았습니다. 미움도 붉디 붉은 장미꽃처럼 시뻘겋게 피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그렇게 스르륵 지는 꽃이 지듯이 지기도 하더군요.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는 내가 힘들었던 기억보다, 어르신이 좀 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가실 수 있게 많이 도와 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나 역시도 늙어가는 모습을 느끼면서, 좀더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것 아니었나 하는 회환도 가져보았습니다. 어르신이 다음 생애는 장애를 가지지 않고 태어나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환하게 볼 수 있는 건강한 삶을 사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또 눈이라도 오면 미끄러질새라 마중나와 주시는 다른 어르신의 사랑을 받으며, 저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끝에서 삶에 대한 선택보다는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해져야 하는 어르신들에게 나는 길라잡이입니다. 정말 어느 누구보다도 머지않은 미래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이 건강함으로 어르신들을 찾아뵐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나는 행복한 요양보호사 여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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